비언어적 기억력과 이중언어 사용의 상관관계
현대 사회에서 이중언어 능력은 단순한 언어 활용 기술을 넘어 인간의 인지 능력과 뇌 기능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언어 처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비언어적 기억력(Nonverbal Memory)’과 이중언어의 관계에 주목하는 학문적 관심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비언어적 기억력은 시각적 정보나 청각적 자극, 공간적 위치, 패턴 인식 등 언어 외적인 정보를 저장하고 회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언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이 기억력의 영역에서도 이중언어 사용자가 단일언어 사용자보다 높은 성과를 보인다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뇌의 정보처리 방식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번 글에서는 이중언어 구사가 비언어적 기억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양한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실생활 및 교육적 시사점을 함께 제시해보고자 한다.
비언어적 기억력의 정의와 측정 방식
비언어적 기억력은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정보를 뇌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 불러오는 능력이다. 대표적인 예는 얼굴을 기억하는 능력, 도형의 배열을 기억하는 능력, 움직이는 물체의 방향이나 경로를 기억하는 능력 등이 있다.
이 능력은 학습, 문제 해결, 사회적 상호작용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시각적 장기기억(visual long-term memory)과 작업 기억(working memory)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비언어적 기억력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심리검사로는 다음과 같은 도구들이 활용된다:
- Rey-Osterrieth Complex Figure Test (ROCF)
- Corsi Block-Tapping Task
- Visual Patterns Test
- Spatial Span Task
이러한 검사는 말로 된 질문이나 단어 암기가 아닌, 도형 복사, 블록 순서 기억하기, 공간 배열 기억하기 등을 통해 뇌의 언어 외적 기억 처리 능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중언어 사용자와 비언어적 정보 처리 방식
이중언어 사용자는 언어 간 전환, 억제(inhibition),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와 같은 실행기능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훈련은 전두엽과 해마, 측두엽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게 되고, 이는 언어 외적인 정보 처리 영역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이중언어 사용자는 시각적 자극과 패턴을 빠르게 인식하고 기억하는 능력에서 유리한 면을 보인다. 이는 두 언어 간의 맥락적 차이와 문법적 구조, 상징적 표현을 반복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비언어적 추론과 비교 능력이 함께 발달하기 때문이다.
연구 사례: 이중언어 아동의 비언어적 기억력 향상
최근 일부 연구에서는 유아 및 아동기의 이중언어 노출이 비언어적 기억력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유아들은 단일언어 아동보다 시각적 자극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도형의 형태를 더 빠르게 재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두 언어 간 의미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직관적으로 감지하기 위해 시각적 상징과 청각 자극을 민감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함께 발달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언어적 선택 과정이 시각적 정보를 더 섬세하게 인식하는 방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중언어 사용 청소년 및 성인의 경우: 복잡한 정보 처리에서의 비언어적 우위
이중언어 청소년과 성인의 경우, 비언어적 기억력은 단순한 도형 기억을 넘어서 복잡한 공간 추론과 시각적 문제 해결 능력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이중언어자는 공간 퍼즐 문제나 지도 해석에서 더 빠른 속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시각-공간적 작업 기억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보인다. 이는 복수 언어 환경에서 훈련된 주의 분산 조절 능력과 인지적 전환 능력이 비언어적 정보 처리에도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한 뇌영상(fMRI) 연구에서는 이중언어자가 시각적 자극을 인식하고 저장할 때 좌측 전두엽과 후두엽의 활성도가 단일언어자보다 높게 나타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노년기 이중언어 사용자와 비언어적 인지 능력 유지
고령자에게 있어 이중언어 능력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넘어서 인지 능력 저하를 지연시키는 예방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언어 외적인 기억력 유지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고령자는 공간 지각력, 도형 추론력, 시각적 작업 기억 등 비언어적 영역에서도 더 나은 성과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중언어 사용이 뇌의 다양한 영역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인지적 훈련이 되며, 뇌 기능의 다방면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실생활 적용: 이중언어 교육과 훈련에서의 시사점
비언어적 기억력 향상과 관련하여, 이중언어 교육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 언어 + 시각 정보 통합 교육
그림 카드, 도형 퍼즐, 시청각 자료 등을 활용하여 언어 학습과 비언어적 인식 과정을 통합시키면 뇌의 여러 인지 기능이 동시에 자극된다.
- 번역과 해석 활동 활용
이중언어 학습 시 두 언어 간의 의미적 대응을 찾는 번역 활동은 언어적 추론 뿐 아니라 비언어적 패턴 인식 능력도 자극한다.
- 시각-언어적 전환 훈련 병행
한 언어로 제시된 정보를 다른 언어와 시각 자료로 연결하는 훈련은 기억력뿐 아니라 인지적 유연성까지 확장시킨다.
비언어적 기억력과 이중언어 사용의 관계는 기존의 언어학적 접근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지과학적 해석을 요구한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언어적 처리뿐 아니라 언어와는 독립적인 정보 인식과 기억 처리 능력에서도 우수한 경향을 보인다.
특히 비언어적 기억력은 학습, 사회성, 문제 해결, 창의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중언어 사용은 이러한 능력의 발달과 유지에 있어 핵심적인 자극 요인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단순한 언어 교육이 아닌 **‘인지력 향상을 위한 전략적 언어교육’**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주류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